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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서정, 서천

해풍에 누운 솔숲과 차진 갯벌을 따라 하염없이 걷다가, 타오르는 낙조 앞에서 말을 잊었다. 충남 서천 앞바다에 온 마음을 바치고 왔다.

UpdatedOn May 2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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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이었다. 녹진한 해풍이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헝클어뜨리는 동안 갯벌은 저 멀리서부터 느리고 고요히 잠겨 갔다. 썰물이 남긴 무수한 연흔도 머지않아 바다의 영역이 될 것이었다. 충남 서천 앞바다엔 이제 막 여름이 도착해 있다. 전망산 꼭대기에 우뚝한 제련소 굴뚝, 바닷바람에 춤추듯 뒤틀린 곰솔, 수묵담채화 같은 서녘 섬들의 능선···. 이 고장이 오랜 세월 간직해 온 고유한 풍경으로 계절의 첫 장면을 아로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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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발을 기준으로 용산역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서천역까지 3시간 정도 걸린다. 장항역에도 정차한다.

서울 출발을 기준으로 용산역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서천역까지 3시간 정도 걸린다. 장항역에도 정차한다.

서울 출발을 기준으로 용산역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서천역까지 3시간 정도 걸린다. 장항역에도 정차한다.

바다의 시간에 잠기다

높이 15미터의 공중 산책로 장항 스카이워크는 서천의 펄과 바다와 녹음을 한데 아우르는 전망대다. 한낮 햇살을 난반사하는 서해와 싱그러운 향내를 뿜어내는 장항 송림. 몇 번을 바라보아도 닳지 않을 아름다움이다. 여름이 깊어질수록 풍광의 채도는 한층 높아진다. 솔숲 그늘에서 자란 맥문동이 꽃망울을 활짝 터뜨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천의 8월은 보랏빛 물결에 발을 적시는 시절이다.

육지와 바다의 점이지대인 갯벌처럼, 서천군 장암리와 항리를 통합한 행정구역인 장항읍은 그 자체로 이미 경계의 땅이다. 시계이자 도계인 장항에는 예부터 유구한 역사와 다양한 생태·문화 자원이 공존해 왔으니, 이곳에 사람과 물자가 모여든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30년대, 장항역 개역과 장항항 개항으로 장항 일대는 일약 서천군의 어엿한 시가지가 됐다. 한때 장항선 철도의 종착역이었던 장항역은 한반도 서쪽의 물류를 관장했으며, 1936년에는 장항제련소까지 가세해 서천의 경제 규모를 불려 갔다.

다만 지역 개발에 대한 기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수십 년에 걸친 정세 변화와 시대 흐름에 따라 도시화는 점차 더뎌졌고, 서천은 꾸밈없이 말간 옛 모습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금강 하구의 유일한 갯벌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오른 서천갯벌의 생물 다양성을 보호할 수 있었던 이유다.

장항 스카이워크 끄트머리에 닿자 ‘기벌포 해전 전망대’라고 쓴 표지판을 맞닥뜨린다. 기벌포는 서천 남서쪽에 걸친 장항읍 일대의 옛 지명으로,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을 수호하던 관문이다.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트린 신라와 당 연합군이 한반도 패권을 두고 반목해 벌인 최후의 해상 전투가 바로 여기서 펼쳐졌다. 나라를 잃은 백제 왕족은 복권을 도모하며 서천 곳곳에 숨어들었는데, 이들이 왕가의 방식으로 빚어 만든 술이 충남의 명주 한산소곡주다. 장항읍 동쪽에 위치한 서천의 또 다른 명소 한산면은 이 한산소곡주와 한산모시가 탄생한 멋과 풍류의 고장이다. 부드럽고 달큼한 곡주의 맛과 향, 기분 좋게 까슬한 모시의 질감이 여름날 정취를 흠뻑 느끼게 한다.

서해에서 더위를 식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백사장에서 모래찜질을 즐기는 게 아닐까. 서천갯벌과 장항 송림 사이에 펼쳐진 백사장은 자동차가 오가도 꺼지지 않을 만큼 단단한 지반을 이루는 데다, 염분과 철분이 풍부해 몸에 좋은 모래로 오랜 세월 사랑받았다. 서천 사람들은 지금도 음력 4월 20일을 모래의 날이라 부르며 백사장에 몸을 던진다. 바다에 기대어 사는 삶의 낙이란 이런 것일 테다.

섬과 나란히 걷다

서천 남서쪽 해안선을 잇는 서해랑길 56·57·58코스는 서해가 숨겨 놓은 절경을 보물찾기하듯 발견하면서 나아가는 길이다. 장항 일대에 걸친 56코스를 지나 크고 작은 섬을 벗한 채 57코스를 걸었다. 죽산리의 아목섬, 다사리의 선배섬, 장포리의 할미섬···. 때로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때로는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면서 걷기꾼의 시간을 풍요롭게 해 준 곳들이다. 하이라이트는 선도리 갯벌 체험장을 마주한 쌍도다. 돌무더기를 쌓아 만든 원시 어업 도구 독살이 뭍에서 섬까지 늘어섰는데, 그 형태가 낯설고도 신비로워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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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남서쪽 해안선을 잇는 서해랑길 56∙57∙58코스는
서해가 숨겨 놓은 절경을 보물찾기하듯 발견하며 나아가는 길이다.

이제 신합리와 도둔리 남쪽의 만을 따라 이어지는 서해랑길 58코스에 들어설 차례. 정석으로 걷지 않고 잠시 곁길로 빠져나와 마량리에 머물렀다. 마량 일대는 육지에서 바다를 향해 비죽 튀어나온 곶이다. 서해의 흔치 않은 일출 명소인 마량 해돋이 마을과 장엄한 일몰이 펼쳐지는 마량리 동백나무 숲을 두루 거느린 이유다. 마량 앞바다는 서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깊고 푸르렀다. 이 창창한 해수면이 떠받친 섬 오력도는 또 얼마나 아름답던지. 뱃사람들을 수호해 온 마량당집과 한산읍성의 세월을 간직한 동백정, 해풍에 팔랑거리며 별처럼 반짝이던 나뭇잎과 미처 떨어지지 못하고 때아닌 여름을 만난 한 떨기 동백꽃을 기억한다. 이 길에서 만난 모든 것이 그저 축복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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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 맥문동 꽃 축제와 춘장대해수욕장 여름문화예술제가 열리는 여름이 오면 서천은 분주해진다. 서해랑길을 따라 장항 송림과 맥문동 군락, 마량리 동백나무 숲과 춘장대해수욕장을 거닐며 축제의 여흥을 즐겨 본다.
문의 041-952-9525

장항 맥문동 꽃 축제와 춘장대해수욕장 여름문화예술제가 열리는 여름이 오면 서천은 분주해진다. 서해랑길을 따라 장항 송림과 맥문동 군락, 마량리 동백나무 숲과 춘장대해수욕장을 거닐며 축제의 여흥을 즐겨 본다. 문의 041-952-9525

장항 맥문동 꽃 축제와 춘장대해수욕장 여름문화예술제가 열리는 여름이 오면 서천은 분주해진다. 서해랑길을 따라 장항 송림과 맥문동 군락, 마량리 동백나무 숲과 춘장대해수욕장을 거닐며 축제의 여흥을 즐겨 본다. 문의 041-952-9525

서해의 삶을 맛보다

여정을 농밀하게 하는 건 맛 좋은 먹거리다. 홍원항은 해산물이 풍부한 서천에서도 손꼽는 어항으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주꾸미와 꽃게, 갑오징어와 전어가 주인공을 도맡는다. 새벽이면 갓 잡은 해산물을 늘어놓고 값싸게 판매하는 시장이 열려 마을 사람과 여행객의 발길이 모여든다. 항구를 에워싼 횟집과 식당은 서천 바다의 맛을 제대로 알려 주겠노라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싱싱함을 보증하는 건 수십 척의 고깃배다. 크고 작은 어선이 옹기종기 정박한 항구엔 밤낮없이 활기가 흘러넘친다.

홍원항을 찾는 이들의 다음 목적지는 당연히 춘장대해수욕장이다. 1978년 서천화력발전소 건설로 동백정해수욕장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서면 도둔리 북서쪽 토지를 개발해 새로운 해수욕장을 조성했는데, 그곳이 오늘날 춘장대해수욕장이다. 춘장대란 이름은 이때 토지 문제를 너그럽게 해결해 주었던 땅 주인의 호 ‘춘장(春長)’에서 따왔다. 청춘의 호기가 깃든 어감이 해수욕장의 장쾌한 풍경과 제법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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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조는 춘장대의 특산물이다. 해무가 잦지 않은 여름이면 횃불처럼 타오르는 해넘이를 볼 수 있다. 가만히 서서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데, 거짓말처럼 색소폰 소리가 바람결에 흩어진다. 붉게 달아오른 하늘같이 선율이 농익었다. 우연은 거듭했으니, 때마침 먼바다에서 야간 어업을 시작한 고깃배가 그림처럼 지나갔다. 태양이 수평선에 내려앉는 찰나였다. 이 사소하고 아름다운 행운을 등대 삼아 마음의 어둠을, 삶의 그늘을 밝히고 싶다. 만조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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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강은주
photographer 신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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