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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소주

원소주가 물꼬를 텄다. 초록 병 소주 말고도, 쌀과 누룩과 물로 곱게 빚은 프리미엄 소주를 향유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전통주 소믈리에 더스틴 웨사가 요즘 소주를 둘러싼 풍경에 대해 말한다.

UpdatedOn May 3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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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술클럽’에 잘 오셨어요.” 서울 이태원 경리단길 초입, 80종에 가까운 한국 술 리스트를 갖춘 바가 생겼다. 전통주 소믈리에 더스틴 웨사는 이곳에서 한국 술을 큐레이션하고, 이따금 직접 빚는다. “소주 드시겠어요?” 그가 백 바 앞에서 신중하게 몇 병을 골라낸다. “그런데 소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세요? 오직 쌀, 누룩, 물 이 세 가지 재료로 만들어요. 우리가 흔하게 보는 초록 병 소주인 희석식 소주와는 맛과 향이 완전히 다르죠. 저는 초록 병 소주가 한국 소주의 전부라는 인식을 바꿔 보고 싶어요.”

증류식 소주를 ‘프리미엄 소주’라 부르며 향유하는 요즘 풍조야말로 소주의 본령을 회복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불과 150년 전만 해도 이 땅에서 소주라고 하면 무조건 증류식 소주를 가리켰다. 쌀, 누룩, 물로 밑술을 빚고, 이를 다시 증류해 만드는 술. 원리는 단순하지만 누룩을 만들고 밑술을 증류하는 과정은 더디고 까다롭다. 과거엔 집집마다 이렇게 술을 빚고 즐겼으나, 연속식 증류기로 만든 주정에 물과 감미료를 섞어 맛을 낸 희석식 소주가 등장했고, 곧 시장을 장악하며 ‘소주’라는 표현을 독점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모든 면에서 판이한 공산품 소주를 증류식 소주와 한데 묶어 논하기 어렵다. “최근에 안동소주 이야기를 들었어요. 오크 통에 넣어 숙성하기 시작한 것을 13년 뒤에 릴리스한다고 하더군요. 그 풍미가 얼마나 대단할까요. 몇백만 원에 팔려도 이상하지 않을 거예요.” 더스틴 웨사에 따르면, 이렇게 한국 소주의 향미가 넓고 깊은 이유는 살균 과정을 거치지 않는 데 있다. “그 덕분에 고유의 개성이 그대로 남았달까요. ‘다이내믹하다’라는 표현을 쓰고 싶네요. 소주는 살아 있는 술이에요.”

그는 다섯 가지 술을 내어 놓으며 기본에 충실한 증류식 소주를 엄선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먼저 삼해소주부터 들이켜 본다. 지난해 별세한 김택상 명인이 생전에 빚은, 몇 병 안 남은 술이다. “독한 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할 맛이죠.” 과연 솜과 면 같은 부드러운 향이 감도는 게 매력적이다. “이제 이걸 들어 보세요. 바다 향이 나죠?” 농태기는 함북 회령 출신의 김성희 하나도가 대표가 만든 술이다. 새터민 손님이 와서 맛보곤 젊은 시절 마시던 술이 생각난다고 했단다. 실제로 북한에서 서민이 농번기에 마시는 가양주를 농태기라고 부른다. 이제 5년 동안 영하 18도에서 숙성한 무작으로 넘어간다. 유약을 바르지 않은 항아리에 숙성했는데, 토기의 미세한 입자 사이로 알코올 기운이 날아가면서 최적의 상태로 발효, 숙성된 술이다. 도수는 53도. “오래 숙성해야 더 부드러워지거든요.”

좁쌀과 보리로 만든 소주도 있다. 우선 고소리술. 잔에 입이 채 닿기 전에 웨사의 설명이 이어진다. “고소리가 무엇인지 설명해야겠네요. 고소리란 제주어로 술을 증류하는 항아리를 뜻해요. 제주 사람들은 좁쌀로 오메기떡을 만들어 술을 빚었어요.” 이름처럼 고소함이 은은하게 전해진다. 전남 강진 지역 술인 병영소주는 보리를 쓴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오랜 세월 전수한 비법으로 술을 빚죠. 쌀로 담근 술에 비해 보리 소주는 향이 좀 더 풍부한 게 특징이에요.”

남산술클럽에서 제공하는 술은 대부분 지역 양조장의 명인에게 웨사가 직접 공수한 것이다. 여행을 하다 양조장 팻말이 보이면 무작정 방문하고, 연락이 닿지 않는 양조장은 지도 앱 ‘로드뷰’를 확대해 전화번호를 찾아낸다. 이 과정에서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술을 만나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 증류기를 비롯한 양조 설비를 갖추고 술을 빚는다. “제가 담근 소주 한번 보여드릴게요. 냄새가 제법 향긋해요.” 정말이지 꽃 향이 은은하고, 견과류 같은 뒷맛이 남는다. “알코올 도수가 63도지만, 보드카 같은 고도주와는 차원이 다르죠. 쌀, 누룩, 물이 빚어내는 풍미가 얼마나 신비로운지 몰라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소주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이쯤에서 줄일게요. 소주 제조 과정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에 대해서라면 말해도 재미없잖아요.” 그는 남산술클럽에 다시 놀러 오라고 했다. 한국 술 명인을 초대해 시음 워크숍을 열고, 술마다 풍미가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는지 이야기 나누는 수업을 소규모로 진행할 거라면서. 마지막으로 그에게 소주가 어떤 술이냐 물었다. “깊은 얘기 나누며 짠, 하고 들이켜는 귀한 술이죠.”

남산술클럽은 소주를 포함해 다채로운 한국 술을 선보인다.

주소 서울시 용산구 녹사평대로 228-2
문의 @namsansool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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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강은주
photographer 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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