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

LIFE STYLE MORE+

불온할 자유, 김수영

1968년 6월,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 시 180여 편을 시대에, 우리에게 놓아두고. 단어 하나를 그냥 쓰지 못하고 온몸으로 끝까지 밀어붙여 얻어 낸 시였다.

UpdatedOn May 25, 2022

/upload/ktx/article/202205/thumb/51045-488505-sample.jpg

정치가 삶에 간섭하지 않은 이는 행복하다. 역사가 일상을 좌우하지 않은 삶은 행운이다. 김수영은 어느 지친 날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이와 동떨어져 사는 사람은 없겠으나, 시류를 타고 인생을 역전한 경우도 많겠으나, 1921년생인 김수영에게 시대의 격랑은 너무도 자주 잔혹하게 깊이 불쑥 삶을 흔들었다. 태어나니 일제강점기였고, 스물다섯에 해방을 맞았지만 극심한 이념 대립이 지속되다 서른에 한국전쟁이 발발해 2년을 포로수용소에서 지냈다. 마흔에 4·19혁명이, 이듬해엔 5·16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몸과 마음을 추스를 시간 여유조차 없이 몰아친 사건들이 그의 생애를 관통했다.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존재해야 했다. 자신을 찾고 자기 삶을 살아야 했다. 김수영은 시를 썼다. 존재의 몸부림이었다.

8남매 맏이로 집안의 기대를 떠안고 자란 그는 아버지 뜻에 따라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떠난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그가 빠진 것이 연극. ‘장남의 길’을 벗어난 그는 가족이 이주한 만주로 가서도 연극 활동을 하다 해방 이후 서울로 돌아와 잡지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고 시인의 길에 들어선다.

시가 밥을 먹여 주지 않으니 시인은 영어 학원에서 강사 생활을 하고 번역을 하면서 생계를 잇는다. 신문물과 사조가 넘치게 밀려온 해방정국의 예술계는 은성하고도 혼란했고, 좌우 이념 대립이 치열한 가운데 서로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어느 쪽에 소속되기를 마다하고 일단 공부하며 사유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하려 하던 중 전쟁이 발발했다. 신혼 2개월 만이었다. 피란을 못 간 시인은 인민군 의용군에 끌려가 군사 훈련을 받다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오지만 이번엔 경찰에 체포돼 거제 포로수용소에 억류된다. 사방이 죽음이었다. 자고 나면 어제 산 사람이 오늘 시체가 되는 곳, 정식 처형도 아니고 마구잡이 증오와 구타가 살인으로 이어지는 곳. 103655라는 포로 번호가 붙은 시인은 민간인 피억류자로 2년을 보낸다.

“인간이 아니었”다 기록한 시절을 겪고 그는 달라진다. 과거와 같은 김수영이라 해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자신은 매일 죽음·비인간성과 마주하다 나왔는데, 하늘에 해가 뜨고 비가 내리고 배고프다 밥을 먹고 농담을 하고 아이들은 밖에 나와 노는 평범한 일상이 대체 어떻게 보였을까. 이제 ‘자유’라는 단어를 두고 ‘새’를 떠올리기란 불가능했다. 그 단어에 묻은 피, 처절함, 서러움. 시인은 사물 하나, 단어 하나를 그냥 쓰지 못하고 온몸으로 끝까지 밀어붙인다. 돈, 헬리콥터, 팽이 같은 것에서도 서러움을 읽었고 피 같은 시가 맺혔다.

고상한 척과는 평생 거리가 멀었고, 세상사 쉽게 돌아서 가는 법은 아예 몰랐다. 시인으로 주목받으면서도 그는 꼿꼿하고 고독했다. 혹시 자신이 문장을 팔아먹는 사람이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1955년 생계를 위해 병아리 열한 마리를 사고 직접 철망을 만들어서 꾸린 양계장이 750여 마리 규모로 커졌을 때도 시인은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고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가며 시를 썼다. 생애 최고 흥분을 선사한 4·19혁명의 기운이 5·16군사정변으로 스러졌을 때도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라고 시를 썼다. 김수영의 시 덕분에 우리는 절망하고 희망하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를 얻었다.

불온한 관찰자 김수영은 불과 마흔여덟 살인 1968년 6월 16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시집 한 권, 문학상 한 번 수상, 총 180여 편의 시. 이후는 김수영의 시대였다. 시대 상황이 그를 불렀을 것이다. 시와 산문 선집과 전집이 연달아 나오고, 저서와 논문이 쏟아졌다. 1981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지금도 김수영은 유효하다. 서럽고 예민한 양심, 바닥까지 파고 내려가는 투철한 자세, 혁명과 자유와 사랑을 꿈꾸는 정신은 1970·1980년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반드시 필요하므로.

시인이 한때 거주하고 묻힌 서울 도봉구에 그를 기념한 김수영문학관이 있다.
친필 원고와 수첩, 책상, 만년필 등 가슴 뛰게 하는 전시물을 정성스레 모았다.
문의 02-3494-1127

<KTX매거진>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editor 김현정

RELATED STORIES

  • LIFE STYLE

    신간, 전시, 영상, 문화

  • LIFE STYLE

    치열한 철도 인생, KTX와 함께 달린 시간

    고속철도 기술 분야 교관 요원으로 선발된 이래 KTX와 함께 달려온 최석중 차량본부 차량계획처장. 38년 철도 인생에 감사하며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그를 만났다.

  • LIFE STYLE

    모든 것은 마음이 하는 일

    2004년 4월 1일 KTX 개통 당시 첫 철도 승무원으로 활약한 이래 20년간 고객을 만나 온 이혜원 코레일관광개발 서울승무지사 승무팀장. 그는 오늘도 여전히 성장하기를 꿈꾼다.

  • LIFE STYLE

    고속철도 ‘기장의 기장’ 이일호 팀장

    KTX 개통을 앞두고 프랑스에 파견 가서 처음으로 고속철도를 배워 온 서울고속철도열차승무사업소 이일호 팀장은 39년 철도 인생에서 27년을 고속철도에 바쳤다.

  • LIFE STYLE

    광명역장 추천 맛집

    창간 20주년을 맞아 ‘역장 추천 맛집’이 다시 돌아왔다. 김옥순 광명역장이 한식과 양식, 디저트까지 소개한다.

MORE FROM KTX

  • CULTURE

    what's up

  • TRAVEL

    미지의 여름 낙원 스타방에르

    갓 잡아 올린 해산물을 맛보고, 근사한 벽화가 이어진 거리를 지나, 숨 막히는 피오르 앞에 선다. 노르웨이 스타방에르, 낯선 여름의 쾌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TRAVEL

    고래가 전하는 낭만, 포항

    경북 포항에 깃든 고래 이야기를 들으며 바다 위 다리에 올라 파도와 마주하고, 한 폭의 그림 같은 마을 안에서 소요했다.

  • CULTURE

    고려의 여름날 - 청동 은입사 물가풍경무늬 정병

  • FILM

    '기차 타고' 강원도 춘천

    직접 거닐고, 만들고, 타고, 자연에서 하룻밤 묵습니다. 겨울이라 더 빛나는 강원도 춘천을 여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