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

CULTURE MORE+

400년을 간직한 맛 부시밀

영국 아일랜드의 한 증류소가 1608년 영국 왕에게 위스키 제조 허가를 받았다. 아이리시위스키, 아니 위스키의 역사가 바로 그때 시작되었다. 이게 바로 부시밀이다.

UpdatedOn February 25, 2022

3 / 10
/upload/ktx/article/202202/thumb/50305-480529-sample.jpg

 

/upload/ktx/article/202202/thumb/50305-480532-sample.jpg

ⓒ Bushmills

“가장 오래되어서 최고가 아니다. 최고이기에 가장 오래되었다.” 우리는 부시밀 마스터 디스틸러인 콜럼 에건의 이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1608년에 세계 최초로 증류 면허를 받아 지금껏 400년 넘는 세월 위스키를 만들어 온 부시밀 아닌가. 조선 시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 영국에선 셰익스피어가 <리어왕>을 발표한 해와 같다는 표현 정도로는 부시밀의 기념비적 의미를 설명하지 못한다. 가장 오래된 위스키의 기록을 매일 경신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면 숫자는 잊고 당장 부시밀을 열어 보자. 값비싼 셰리 캐스크에서 숙성해 더 그윽한 과일 향이 감미로이 번진다. 위스키가 글라스 벽을 타고 내려오는 자국, ‘위스키의 눈물’이라 부르는 레그가 그림 같은 흔적을 남긴다. 황홀할 만큼 부드러운 목 넘김 뒤에도 계속 입안을 감도는 향기. 이미 숫자는 망각했다. 오직 부시밀 세 글자가 뚜렷하다. 400년 넘는 세월 동안 이 위스키를 맛본 대부분이, 아주 조금 과장해 모두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 위스키 시장을 주름잡는 지역은 영국 스코틀랜드와 미국이다. 각각 스카치위스키, 버번위스키를 제조하는 두 지역에선 맥캘란, 발렌타인, 조니 워커, 와일드 터키, 버팔로 트레이스처럼 이름부터 심장을 강타하는 걸작이 대거 탄생했다. 시장을 양분하다시피 흥행하는 두 지역 위스키 사이에서, 현재 영국 아일랜드의 아이리시위스키는 하루가 다르게 존재감을 키우는 중이다. 하지만 주의해야 한다. 매출 실적 따위와는 별개로 그런 표현은 아일랜드 사람에게 무례하게 들릴 테니 말이다. 위스키 좀 아는 마니아에게도 코웃음 나오는 표현인 건 매한가지다. 아일랜드는 구전과 기록을 종합해 지구에서 가장 먼저 위스키를 만들고 즐긴 나라로 추정된다. 11세기경 수도사들이 지중해에서 증류 기술을 들여온 이야기, 13세기 아쿠아 비타(생명의 물)를 마신 병사들이 용맹하게 싸웠다는 이야기, 15세기 한 수도원의 아무개가 과음 끝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이야기 등등. 지구에서 최초인지는 역사학자가 밝힐 문제이나, 아일랜드 사람들이 어떤 민족보다 위스키를 사랑하고 장기적으로 즐겨 왔다는 사실은 밝힐 필요 없는 정설이다. 

3 / 10
/upload/ktx/article/202202/thumb/50305-480528-sample.jpg

 

3 / 10
/upload/ktx/article/202202/thumb/50305-480531-sample.jpg

북아일랜드 앤트림주 부시강의 맑은 물로 만드는 부시밀은 샌프란시스코 월드 스피릿 컴피티션 등 세계 유수 주류 품평 대회를 석권하면서 대중과 비평가에게 찬사를 받고 있다.

북아일랜드 앤트림주 부시강의 맑은 물로 만드는 부시밀은 샌프란시스코 월드 스피릿 컴피티션 등 세계 유수 주류 품평 대회를 석권하면서 대중과 비평가에게 찬사를 받고 있다.

3 / 10
/upload/ktx/article/202202/thumb/50305-480530-sample.jpg

 

아이리시위스키의 역사, 부시밀

그럼에도 누군가가 아이리시위스키에 대해 반박 불가능한 사실 하나만 내놓아 봐라 하거든 부시밀로 대답하면 된다. 전술했듯 1608년, 지금의 북아일랜드 앤트림주 자그마한 마을 한 증류소가 영국 왕 제임스 1세에게 위스키 증류 허가를 얻어 낸다. 스카치위스키보다 200년 앞서 면허를 받은 증류소는 복잡한 국제 관계 속에서 밀주가 성행하던 시대에 당당하게 위스키를 빚었다. 마을 주민이 힘을 합쳐 현무암 암반 위를 흐르는 부시강의 맑은 물로 빚은 위스키는 18세기 아이리시위스키의 부흥을 이끈다. 부시밀에서 정식 출발한 아이리시위스키가 날로 명성을 쌓아 1700년대 중반 아일랜드에만 무려 1200여 곳의 증류소가 있었을 정도로 대호황을 맞이했다. 치열해진 경쟁 탓에 증류소들이 질 낮은 위스키를 양산하고, 20세기 들어서는 아일랜드 독립 전쟁, 영국과의 무역 마찰, 미국 금주법 등으로 위스키 산업이 치명적 타격을 받는 중에도 부시밀 증류소는 꿋꿋하게 운영을 이어갔다.

수백 년간 중첩된 변화로 인해 1960년대 아일랜드엔 오직 두 개의 위스키 회사만 살아남았으며, 1972년에는 결국 한 곳만 아이리시위스키의 명맥을 잇게 되었다. 증류소들이 분열되고 통합하는 고단한 시대가 마무리된 오늘날, 아이리시위스키는 또 한 번의 부흥기를 준비하고 있다. 이제 다양한 브랜드를 선보이는 아일랜드 증류소 가운데 부시밀은 단연 돋보인다. 두 번 증류하는 스카치위스키와 다르게 세 번 증류해 향이 부드럽고, 특수 효모를 입힌 셰리 캐스크에서 숙성하기에 맛은 더없이 풍부한 부시밀. 맛보는 순간 망각해 버린 400여 년 역사를 굳이 떠올려 보면서 천년의 부시밀을 상상한다. 그때도 아일랜드 작은 마을 증류소의 마스터 디스틸러는 말할 것이다. “가장 오래되어서 최고가 아니다. 최고이기에 가장 오래되었다.”

/upload/ktx/article/202202/thumb/50305-480533-sample.jpg

<KTX매거진>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Editor 김규보

RELATED STORIES

  • CULTURE

    나비가루가 손에 묻을 듯하니

  • CULTURE

    이제는 국가유산

    반가사유상 없는 대한민국을 상상할 수 있으랴. 우리에게 여전한 감동과 지혜를 전하는 문화재 이름이 바뀌었다.

  • CULTURE

    아름답다는 건 나답다는 것

    불량 치즈가 자기애 넘치는 캐릭터 ‘치즈덕’으로 거듭나 우리의 고단한 삶을 어루만진다. 우주 최강 ‘자존감 지킴이’, 치즈덕 세계관의 창조주 나봄 작가에게 이야기를 청했다.

  • CULTURE

    당신도 아는 그 마음

    좋아하는 마음은 눈앞에 운석처럼 떨어진다. 혹은 자신도 모르는 새 스며든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팬과 스타의 관계를 잘 담아 낸 콘텐츠를 소개한다.

  • CULTURE

    신간, 전시, 영상, 문화

MORE FROM KTX

  • ARTICLE

    안녕, 경주역·불국사역

    지난해 12월 28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경주의 17개 역을 뜨겁게 기억한다.

  • LIFE STYLE

    쓰레기가 사라질 때까지 줍깅

    곱디고운 하천에 쓰레기가 무슨 말일까. 걸으며 쓰레기를 주워 담는 줍깅을 에디터 4명이 실천했다. 물처럼 곱디고운 순간이었다.

  • LIFE STYLE

    전설, 밥 말리

    평등, 자유, 인권. 밥 말리는 이 아름다운 단어를 노래로 만들었다.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가운데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게 했다.

  • LIFE STYLE

    우리 지금 만나, 이색 컬래버레이션

    음식 간 융합 열풍은 아직 진행 중. 그 유행에 슬며시 탑승해 봤다.

  • CULTURE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

    아카데미상의 행방이 궁금해지는 시기,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우뚝 선 영화의 신전을 만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