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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우, 우리 시대의 경청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몸을 낮추어 바라본다. 미술가 천경우의 감각을 빌려 잠시나마 세상을 경청하는 시간이다.

UpdatedOn April 2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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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귀가 아닌 눈으로, 마음으로 듣는다. 서울 시립서대문농아인복지관의 청각장애인 열여섯 명은 각기 다른 종소리의 크기와 음색을 상상하며 노래를 짓고 악보를 만들었다. 곡명은 ‘참 좋은 말’에서 ‘나의 피난처’에 이르기까지, 다정하고도 내밀한 삶의 풍경을 아우른다. 전시 공간에 옮겨 둔 악보는 관람객에 의해 여섯 개 종으로 연주되었다. 미술가 천경우가 2021년에 선보인 퍼포먼스·설치 작업 ‘가사 없는 노래 Ⅰ’의 전말이다.

이 아이디어는 2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인도 남서부 고아 지역 어린이 합창단이 ‘가사 없는 노래 Ⅰ’을 그들의 목소리로 해석하고 재현한 프로젝트 ‘가사 없는 노래 Ⅱ’에 다다른 순간이다. 노래의 뜻을 명확하게 헤아릴 순 없어도 아이들의 신중한 표정과 말간 음색은 순식간에 공감각적 파동을 일으키고,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청각 또는 시각이 부재한 이들은 여러 가지 감각을 동시에 활용해 인식하고 경험합니다. 우리가 감지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대상은 언제나 문자나 언어, 기호 바깥에 있다고 생각해요.” 텍스트와 이미지가 넘쳐흐르는 시대, 우리는 무엇을 듣고 어떻게 보아야 할까. 천경우의 근작을 망라한 전시 <경청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너그러운 응답이자 속 깊은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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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를 건너며 우리가 보고 들은 것

어둑한 전시장 입구, 전시 개막일에 진행한 퍼포먼스 ‘Good. Story. Teller(굿. 스토리. 텔러)’를 기록한 영상이 온기를 퍼트린다. 20인의 참여자는 타인에게 들려줄 책을 작가에게 보낸 다음,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선택된 책을 낭독하고 혹은 경청한다.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 이 모든 상호작용을 목도하는 또 다른 사람.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다자간의 교감이 묘한 울림을 안긴다. 이 작품이 예고하듯, 천경우가 지난 3년간 지구 곳곳에서 발견하고 수집한 이야기들은 한목소리로 대면과 접촉의 대체 불가능성을 역설한다.

바이러스가 지구를 휩쓸기 시작한 2020년, 폴란드 노인 일곱 명이 생애 가장 특별한 기억을 구술함으로써 이루어진 프로젝트 작업 ‘Reminiscence(레미니슨스)’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인물들의 표정과 격정 어린 음성으로 우리를 흔들어 놓는다. “유럽의 노인들은 코로나19 유행 초기에 짧지 않은 고립의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 시도한 작업이에요. 이분들께 이야기할 기회를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가 하면 여전히 코로나19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한 2022년,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 모인 100명의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먼 곳에 위치한 이에게 스마트폰으로 연락해 얼굴 사진을 전송받은 뒤 그 얼굴을 지점토로 빚어 냈다. 이 퍼포먼스를 통해 100개의 두상 조각 ‘여행하는 얼굴’이 탄생했다. 비대면, 비접촉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타인과의 소통 방식을 탐구한 결과물이다.

퍼포먼스 기록 영상 ‘Good. Story. Teller’

퍼포먼스 기록 영상 ‘Good. Story. Teller’

퍼포먼스 기록 영상 ‘Good. Story. Teller’

평범하고도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소통 방식과 자연 속에서 교감하는 인간의 모습을 포착한 <경청자들>전은 사진, 영상, 퍼포먼스, 설치를 아우르며 경청하는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서울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6월 23일까지 열린다. 문의 02-6929-4465

평범하고도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소통 방식과 자연 속에서 교감하는 인간의 모습을 포착한 <경청자들>전은 사진, 영상, 퍼포먼스, 설치를 아우르며 경청하는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서울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6월 23일까지 열린다. 문의 02-6929-4465

평범하고도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소통 방식과 자연 속에서 교감하는 인간의 모습을 포착한 <경청자들>전은 사진, 영상, 퍼포먼스, 설치를 아우르며 경청하는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서울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6월 23일까지 열린다. 문의 02-6929-4465

천경우는 이처럼 지극히 평범하고도 다채로운 인물들이 소통을 시도하며 벌어지는 상황에 주목한다. “저는 우리가 지닌 솔직하고 연약한 부분을 숨김 없이 보여 주고 싶어요. 그래서 인간적 특성이 잘 드러나는 사람들, 그리고 이들의 고유한 소통 방식을 좋아해요.” 허위나 가식을 거둔 진솔한 몸, 순수한 태도에 주목한 그의 시도는 숲을 마주한 아이들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 연작 ‘Resonance(레조넌스)’로 이어진다.

앞서 언급한 ‘가사 없는 노래 Ⅱ’의 시연자로 나섰던 어린이들이 숲을 향해 노래를 부르는 광경과 그 시간을 사진으로 축적한 것이다. 이 곡은 할머니에게 배운 인도 남서부 지역 소수 언어로 이루어진 구전 노래이며, 아이들의 가창은 ‘나무들을 위한 노래 #1 #2’라는 2채널 영상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익숙한 소리엔 귀 기울이지 않고, 잘 모르는 낯선 소리엔 거부반응을 일으켜요. 제겐 두 가지 소리가 모두 중요해요. 바람 소리,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의 이야기 소리 같은 것들. 보이지 않거나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우리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의미를 부여할지 고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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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기울이면 밝아지는 것들

경청이란 천경우가 지금껏 예술가로서 지켜 온 태도이자 미학이다. 일찍이 그는 카메라 너머 상대와 교감하는 과정을 사진에 담아내며 크게 주목받았다. “저는 세상을 직접 경험하고 싶은 소년이었어요. 화실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관찰하길 좋아했죠. 그게 사진을 공부하게 된 이유예요.” 인물을 대면하고 사물을 마주하는 사진 매체의 즉물적 실감에 이끌린 그는 언제부터인가 명료한 재현을 넘어 ‘진짜’를 표현하고자 했고, 이미지를 완성해 가는 궤적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에 선보인 그의 초기작에 시간이 어른거리는 이유다. ‘Thirty-Minute Dialog(서티 미닛 다이얼로그)’ ‘One-Hour Portrait(원 아워 포트레이트)’ ‘Six Days(식스 데이즈)’···. 짧게는 30분에서 한 시간, 길게는 엿새의 시간을 응축한 장노출 기법으로 포착한 인물들은 흔들리고 부유하는 듯한 모습으로 프레임을 가득 메운다. 그리하여 이들은 고정된 피사체가 아닌, 기꺼이 움직이며 감응하는 존재가 되어 프레임 밖의 우리를 불러 세운다. “사진의 ‘모멘트’가 수백 분의 1초라면, 저는 시간의 두께를 이미지로 구현하려 했어요. 이런 작업을 통해 나와 대상의 관계, 인물과 인물 간의 관계로 이야기를 넓히기 시작했죠.”

사진에서 출발한 천경우가 퍼포먼스와 영상과 설치를 아우르는 개념미술가로 거듭나기까지 쉬지 않고 시도한 것이 바로 소통이다. 인물 간의 물리적 관계와 연대는 그가 오랫동안 몸을 낮추어 살뜰히 돌본 소재다. 독일 부퍼탈에서 사진을 공부하던 시절, 몸소 동료 아티스트들과 교류하며 삶과 예술의 저변을 넓힌 그는 소리와 음악을 새로운 질료로 받아들였다. 이미지를 선택하고 표현하는 사진 매체의 일방적 속성에 대한 회의감, 나아가 이미지의 효용에 대한 의구심에 사로잡힌 젊은 사진가에게 이러한 청각적 경험과 영감은 사진 바깥의 다양성과 가능성을 탐색하게 했다. “소리와 이미지는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시각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의존하느라 다른 감각들이 무뎌지고 잊혀 가는 지금, 우리가 몸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어요.”

다시 <경청자들>의 전시장. 너른 숲을 떠오르게 하는 진녹색 벽에 새 그림이 빼곡히 붙어 있다. 핀란드 헬싱키 앞바다의 새소리를 듣고 새의 형상을 상상해 그린 뒤,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사람의 이름을 적어 넣는 참여형 프로젝트 ‘Bird Listener(버드 리스너)’다. 과연 새의 지저귐 위에 포개지는 하나의 얼굴이 있다. 가만히 경청하면 보이는 것, 천천히 응시하면 들리는 세계. 천경우가 일깨운 감각의 경로를 따라 오래도록 되새기고 싶은 풍경이다.

천경우는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독일로 건너가 사진과 퍼포먼스, 공공 미술, 설치, 영상 등으로 활동 반경을 확장했다. 그는 의식, 감정처럼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현상이나 존재 양식을 관찰하며 조형적인 형태로 이끌어 온 작가다.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가 하나 더 있다. 제주도 서귀포 포도뮤지엄이 내년 3월 20일까지 개최하는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전에서 천경우는 관람객에게 눈을 감은 채 그립고 아름다운 얼굴을 그리도록 하는 프로젝트 ‘Most Beautiful(모스트 뷰티풀)’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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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강은주
photographer 신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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