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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여행

한 손은 종이를 누르고 다른 한 손은 필기구를 쥔다. 그러고는 적어 내린다. 생각을, 마음을,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챗GPT 시대, 우리는 여전히 몸으로 쓰는 존재다.

UpdatedOn April 2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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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와 펜만 있으면 모든 게 가능하다고 믿었다. 적어도 12년 전엔 그랬다. 엊그제 봄맞이 대청소를 하다가 배낭여행 중 흘려 쓴 일기와 메모를 발견했다. 접이식 지도나 관광 정보지 한 귀퉁이에 두서없이 끼적인 글줄, 절절히 눌러 썼으나 전하지 못한 엽서들. 스마트폰 없이 떠난 마지막 여행의 기록물이다. 아아, 우리는 무얼 바라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걸까. 바삭한 종이와 차갑고 매끈한 펜의 촉감, 머리와 심장에서 손끝으로 물컹한 뭔가를 밀어내는 감각.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일 만큼 쓰고, 또 쓰고, 무수히 쓰던 날들이 언제부턴가 희미하기만 하다. 쓰는 쾌감을 되찾을 수 있을까? 더 늦기 전에 종이와 필기구를 마음껏 놀리기 위한 짧은 여정을 계획하기로 한다. 마침 펜을 들어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기 좋은 계절이다.

첫 번째 목적지는 감정서가(@gamjungseoga)다. 서울 용산역 근방에 자리한 서울예술교육센터에서 운영하는 공간으로, 일상에서 흘려보낸 감정을 길어 올릴 수 있도록 사려 깊은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입장과 함께 받아 든 ‘감정카드’에 떠오르는 감정을 적고 사서함에 넣으면, 큐레이션을 거쳐 문장 전시 아트 월에 걸리거나 <감정출판>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다. 쓰는 행위만으로 예술에 동참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니 얼마나 근사한가. 카드를 쓰지 않아도 좋다. 고요와 몰입을 유도하는 널찍하고 차분한 테이블, 정갈하게 비치된 필기구를 이용할 수 있으니 일기든 편지든 쓰기를 미뤄 둔 그 무엇이든 시작해 본다. 곳곳에 걸린 유려한 문장을 곱씹으면서 필사하는 일도 즐거울 것이다.

이번엔 쓰기를 공감각적으로 체험할 차례다. 서울 망원동 다다랩(@cafedadalab)의 인사말은 다음과 같다. “주문하신 문장을 내려 드립니다.” 말 그대로 ‘작업 지시서’에 문장을 써서 주문하면 주인장은 이것을 커피와 차와 술로 번역해 오직 하나뿐인 한 잔을 완성한다. 글이 맛과 질감을 가진 액체가 되어 눈앞에 나타나는 풍경은 퍽 마술적이다. 레트르 성수(@rettre_seongsu)는 서울 성수동 카페거리 한가운데 자리한 향수 공방으로, 나만의 향수를 만드는 원데이 클래스가 끝난 뒤 조향의 순간을 물리적으로 각인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편지를 남기는 ‘레트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편지는 1년 뒤에 돌려준다. 과거의 문장을 읽으며 향과 추억을 환기하는 경험까지 선사하는 셈이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필기구 애호가의 성지 모나미 스토어(@monami_official) 성수점이 있다. DIY 펜 만들기만큼 흥미진진한 체험 프로그램 ‘잉크랩’을 이용하면 여러 가지 잉크를 배합해 나만의 색깔, 나만의 잉크를 완성하도록 도와준다. 잉크의 오묘한 향, 촉감, 고유한 정서를 음미하며 쓰기에 대한 열망을 북돋우는 시간이다.


쓰는 여행은 서울 연희동을 산책하는 것으로 갈무리한다. 이곳엔 쓰는 존재를 위한 세 공간이 모여 있다. 순우리말로 편지를 뜻하는 글월(@geulwoll.kr)이 연희동우체국 바로 옆 건물 4층에 들어선 건, 우연일까? 이름처럼 편지에 대한 모든 것을 취급하는 이곳에서는 단정한 편지지와 필기구는 물론, 낯선 이와 펜팔을 주선하는 ‘펜팔 서비스’란 콘텐츠를 마련한다. 우체국 다음 블록에 자리한 포셋(@poset.official)엔 사진과 일러스트와 그래픽 등으로 디자인한 아름다운 엽서 3000여 장이 정연하게 진열돼 있다. ‘엽서 도서관’이란 별칭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풍경이다. ‘기록보관소’를 이용하면 혼자 또는 여럿이 사용 가능한 수납함과 기록을 위한 좌석까지 제공해 준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비밀 책방 페잇퍼(@paperr.bookshop)가 특별한 이유는 아기자기한 소모임과 커뮤니티에 있다. 글쓰기도 그림 그리기도 아닌, 오직 낙서에 탐닉하는 ‘일상 낙서 프로젝트’ 모임, 두들페잇퍼(@doodlepaperr)를 꽤 오래전부터 눈여겨보고 있다. 새로운 멤버 모집이 언제더라? 펜을 들고 싶어서 온몸이 달뜬다.

+ 쓰는 여행자를 위한 목록

이립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에 들어선, ‘레터하우스’를 표방하는 작은 티룸. 편지지와 차를 한 세트로 마련한다. @erip-jeju
티디에스 대구시 남구 대명동의 문구 숍. 여기서 낯선 이에게 편지를 쓰면, 누군가가 쓴 편지 한 통을 돌려받는다. @from.t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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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강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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