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

TRAVEL MORE+

달리는 이야기, 교차하는 사람들

기차역은 인간사의 무수한 만남이 교차하는 운명적 장소다. KTX 개통 19주년을 기념해 철도에서 샘솟은 이야기를 따라 시간 여행을 떠나 본다.

UpdatedOn March 24, 2023

3 / 10
/upload/ktx/article/202303/thumb/53309-511285-sample.jpg

 

영화의 탄생과 동시에 스크린의 주인공으로 출연한 것은 다름 아닌 기차였다. 정거장에 들어서는 기차의 거대한 움직임을 촬영한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이 그랬듯, 현존하는 한국 영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 <청춘의 십자로> 또한 기차역을 이야기 무대로 공들여 담았다. 철로를 따라 경의선 열차가 달리는 모습부터 1930년대의 복닥복닥한 경성역 광장 풍경까지, 당대의 첨단 문명과 도회적 정취를 보여 주는 수단으로 철도를 활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 철도의 구심점, 서울역으로 대변되는 기차역이란 공간은 시절을 불문하고 한 인간이 내던져진 세상이자 생애의 한 장이 시작하는 순간으로 표상된다. 1950년대 작품 <어느 여대생의 고백> 주인공 소영부터 1970년대를 풍미한 <별들의 고향>의 애달픈 연인 경아를 지나 2000년대 <친절한 금자씨>에서 막 출소한 금자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수많은 승객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이기도 한 서울역은 인물이 의미심장한 걸음을 떼는 무대로 등장하곤 했다.

3 / 10
/upload/ktx/article/202303/thumb/53309-511286-sample.jpg

 

공교롭게도 KTX가 개통한 2004년 전후 몇 년간을 흔히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기’라 부른다. 새 시대의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기 시작한 까닭에 철도는 이전보다 다양한 역할을 도맡았다.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기찻길 장면이 만들어진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박하사탕>의 영호가 “나 돌아갈래”를 외치는 순간은 충북 충주 삼탄역과 제천 공전역 사이 터널에서, <살인의 추억> 마지막을 장식하는 추격과 격투 신은 경남 진주 개양역과 사천 사천역 사이 터널에서 촬영한 결과물이며,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두 주인공의 운명을 주관하는 결절점은 현재 사라진 서울 용산역 구 역사다. 이처럼 철길과 기차역이 얄궂은 삶을 은유하는 예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가 하면 기차가 지닌 압도적인 속도감이 이야기를 추동하기도 한다. 영화 <라이터를 켜라>는 ‘기차 액션’을 표방한 활극이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오합지졸 사내들이 라이터 하나 때문에 벌이는 소동을 그린다. 주인공 일당은 천안역에서 들이닥친 경찰에게 진압되는데, 실제로는 울산역을 천안역으로 꾸며 촬영했다고 한다. 좀비 영화 <부산행>은 서울과 부산을 잇는 철로 442킬로미터 길이만큼이나 압도적 스릴을 선사한다. 대전역에서 좀비들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은 실제로 부산 부산진구 부전역에서, 기차가 동대구역에 닿아 가는 모습은 부산철도차량정비단에서 촬영했다는 뒷얘기도 영화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때론 배경을 넘어 배역까지 수행하고, 다른 역인 양 시침 뚝 연기까지 해내는, 영화 속 놀라운 기차역의 목록은 다음 장에서 펼친다.

이곳에서 촬영했어요

3 / 10

 

 MOVIE

<기적>

# 삼척 도경리역

기찻길은 있는데 기차역이 없는 마을, 주민들이 의기투합해 간이역을 세운다. 한국 최초 민자 역사인 경북 봉화 양원역을 소재로 한 영화이니만큼 주인공은 기차역 그 자체다. 산골짝 간이역과 철로를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 제작진은 경북 상주와 영주, 강원도 정선과 원주 등 전국 각지를 누볐다. 극 중 승부역으로 등장하는 건물은 강원도 삼척 도경리역이다.

3 / 10
/upload/ktx/article/202303/thumb/53309-511278-sample.jpg

 

 MOVIE

<미스 진은 예쁘다>

# 부산 동래역

부산 동래역에 귀여운 꼬맹이 하나와 노숙인 미스 진이 등장한다. 불안 증세를 보이는 중독자 동진까지 합세해 잔잔했던 동래역의 일상은 순식간에 활기를 띤다. 철도 건널목 지킴이 수동과도 어울리기 시작한 이들은 특별한 우정을 쌓아 가며 연대한다. 영화의 주 무대인 옛 동래역은 1934년 동해남부선과 함께 영업을 시작한 유서 깊은 역이다.

3 / 10

 

 MOVIE

<가족의 탄생>

# 광명역

미라는 남동생의 엄마뻘 연인과 낯선 아이를 집에 들인다. 그렇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이 누구보다 애틋한 가족을 이룬다.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모든 인물은 햇살이 들이치는 경기도 광명역 곳곳에서 스치거나 엇갈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광명역의 유려한 건축적 미감이 이야기의 여운을 조금 더 오래도록, 진하게 음미하도록 한다.

3 / 10

 

 MOVIE

<파수꾼>

# 고양 원릉역

어리고 상처받기 쉬운 시절의 세 소년 기태, 희준, 동윤은 사소한 오해 때문에 서로를 할퀴고 배신한다. 한때는 틈만 나면 텅 빈 기차역을 배회하며 캐치볼을 하고 놀던 해맑은 아이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비극이 찾아온다. 경기도 고양시의 원릉역은 이야기 내내 흐르는 쓸쓸하고 위태로운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KTX매거진>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editor 강은주

RELATED STORIES

  • TRAVEL

    수장고를 누비는 모험

    100만 점 넘는 유물과 자료를 소장한 국립민속박물관이 경기도 파주에 수장고형 박물관을 조성했다. 수장고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 TRAVEL

    밀양은 언제나 축제

    늠름한 영남루, 흩날리는 이팝나무꽃의 환대를 받으며 경남 밀양 땅에 들어선다. 누구보다 고장을 사랑하는 사람, 황선미 문화관광해설사가 든든한 동행자로 나섰다.

  • TRAVEL

    작고 소중한 시네마 천국

    걸어 다니면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지만 우리에겐 공간이 필요하다. 남다른 취향과 기발한 기획력으로 영화 팬에게 사랑받는 아지트 네 곳을 모았다.

  • TRAVEL

    청차우섬이 선물하는 평안

    거대한 빵탑이 홍콩 청차우섬에 우뚝 선다. 희생된 영혼을 달래는 것에서 유래한 빵 축제가 다가온다는 신호다.

  • TRAVEL

    강화라는 꽃

    발 닿는 곳마다 눈부시게 피어나는 섬, 인천 강화에서 한 시절을 보낸다.

MORE FROM KTX

  • ARTICLE

    다시 봄, 춘천

    옛 철길과 강을 따라 레일바이크를 타고, 케이블카에서 호수를 내려다봤다. 강원도 춘천은 언제나 그리우면서 새로운 도시다.

  • TRAVEL

    대도시의 로맨스

    고층 빌딩 빽빽한 서울에서도 로맨스가 피어난다. 판타지 로맨스 속 환상적인 장면의 배경을 모았다.

  • TRAVEL

    아프고 뜨거운 그곳

    삼일운동은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투쟁이었다. 삼일절을 맞아 일제강점기 배경 작품을 보면서 기억해야 할 것을 되새긴다.

  • LIFE STYLE

    육즙 없이 도달한 프렌치 다이닝의 충만함

    페스코 베지테리언을 지향하는 프렌치 레스토랑 ‘르오뇽’의 허진석 셰프는 채수와 유지방만으로 풍미를 완성한다.

  • LIFE STYLE

    세상 모든 재료를 위하여

    한국과 덴마크, 호주를 오가며 요리를 익힌 B3713의 정혜민 셰프는 재료를 존중하는 것에서 코리안 노르딕 퀴진이 출발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