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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날의 여행

한 해를 시작하는 즈음, 경북 김천을 걸었다. 겨울이 가고 시간이 지나도 녹지 않을 말을 찾았다.

UpdatedOn January 2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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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깃든 오랜 절은 이미 자연이었다. 이름에 곧을 직(直)을 지닌 절이
수많은 곡선을 그리며 너그러운 품으로 여행자를 맞는다.

담장은 낮고 나무는 높았다. 나무를 베어 내지 않으려 어느 담장은 갑자기 휘돌았고, 중간에 끊기기도 했다. 산에 깃든 오랜 절은 이미 자연이 되었건만, 가꿔 온 세월 동안 자연과 사람 중 누가 주인인지를 기억했음이 분명했다. 그 흔적을 발견하는 여행이 즐거웠다. 도시 이름에 샘 천(泉) 자가 들어간 김천 직지사는 물이 풍부한 황악산 자락에 놓여서인지, 곳곳에 크고 작은 나무가 불쑥 자라는 사찰이었다. 어디는 한두 그루, 어디는 거의 숲, 그 사이사이에 건물. 이름에 곧을 직(直)을 지닌 절이 수많은 곡선을 그리며 너그러운 품을 자랑했다. 한 해의 출발선에 선 즈음, 걸음 딛을 방향을 찾아 직지사로 향했다.
 

 +  서울 출발을 기준으로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김천(구미)역까지 1시간 30여 분이 걸린다.

임진왜란 당시 의승병을 이끈 사명대사가 직지사에서 출가했다. 절에는 그가 소년 시절 누웠다 전하는 바위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승병을 이끈 사명대사가 직지사에서 출가했다. 절에는 그가 소년 시절 누웠다 전하는 바위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승병을 이끈 사명대사가 직지사에서 출가했다. 절에는 그가 소년 시절 누웠다 전하는 바위가 있다.

첫 마음이 담긴 사찰, 직지사

418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1604년 전 아도화상이 신라 땅에 넘어와 사찰을 짓는다. 무엇이든 최초가 있는 법. 흔히 불교 국가로 기억하는 신라도 처음부터 불교의 나라는 아니었다. 기원전 57년에 세운 신라가 6세기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했으니, 직지사는 아직 대다수 사람이 불교를 모르던 시기의 사찰이다. 변방에서 중심으로. 산에서 발원한 조그만 샘물이 흐르고 흘러 넓은 대지를 적시는 것처럼 삶과 죽음, 올바름과 삿됨을 고민하는 철학과 신앙은 마침내 신라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나라가 공인하기 100년 이상 전에 지은 초기 사찰은 불자가 된 신라인에게 평생 한 번이라도 방문하고 싶은 성지와 같았을 것이다. 첫 마음을 간직한 거룩한 곳이라 할까.

그렇다고 무게감에 짓눌리지 말라는 듯 일주문까지 소박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키 큰 나무가 양옆에 늘어서서 걷는 내내 시선이 하늘로 올라간다. 나무가 몇 살이면 저만큼 자랄까. 이 나무에서 다음 나무로 걸음을 옮기는 길이 호사스럽다. 좀 더 가도 좋겠다 싶은데 이내 일주문이다. 직지사가 역사상 중요한 사찰이라는 이유로, 혹은 사람들의 깨달음을 위해서라며 산문과 건물의 거리를 길게 설계할 수 있건만 직지사는 그저 자연스럽다. 산세가 허락하는 대로 길과 건물을 내고 사람은 그 안을 누린다. 자연스러움이 평온함을 선사한다.

463년 전, 한 고아 소년의 눈에도 이 절이 그러했을까. 1544년 태어나 10대 초반에 부모를 여읜 소년이 직지사에 흘러들었다가 만 열다섯에 출가한다. 오늘날 직지사와는 다른 모습이었을지언정 당시에 이미 1100년 넘는 세월을 간직한 고찰은 누군가의 생애를 결단하게 하는 기운이 서려 있었나 보다. 그가 유명한 유정, 사명대사다. 열일곱 나이에 과거 시험 승과에 급제한 실력자인 사명대사는 스물아홉이 되어 주지로서 직지사에 부임하기도 했다.

번듯한 자리를 마다하고 서산대사를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는 등 오로지 깨달음을 추구한 삶이 급변한 계기는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 네 글자는 침략당한 조선 사람의 고통을 결코 담지 못한다. 생명과 생계를 빼앗긴 참상을 목격한 사명대사는 뜻을 함께하는 승려를 모아 전장에 나선다. 어느새 마흔여덟의 나이였다. 지혜와 지략, 용맹함이 장수를 능가해 평양성을 비롯해 여러 전투에 임했고, 비전투 시에는 전쟁을 대비한 성을 쌓는 데 힘썼다. 조선이 유교 국가임에도 <조선왕조실록>에 그를 언급한 횟수가 100회가 넘는다. 법명인 ‘유정’을 임금이 친히 언급하기도 여러 번이다.

그는 참전만 할 뿐 아니라 어명을 받아 가토 기요마사,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협상을 벌여 조선에 유리한 결과를 이끌고, 일본에 잡혀간 포로 3000여 명을 귀환시켰다. 정부가 못 한 일을 승려 한 사람이 해낸 것이다. 임금은 사명대사를 곁에 두려 했으나 임무를 마친 그는 절로 돌아갔다. 광해군은 그의 몸이 쇠했다는 말을 듣고는 약을 지어 보내라 했고, 이듬해인 1610년에 입적하자 장례 물품도 챙겨 하사했다. 천왕문 옆에는 대사께서 열다섯 소년 시절 직지사에 처음 와서 누웠다 전하는 평평한 바위가 있다. 한낱 전설일지라도 의미는 짙다. 자비와 구도를 목숨 걸고 실천한 고승의 출발이 이 바위처럼 평범했다. 내일이 그려지지 않는 막막한 심경으로 바위에 누웠을 소년을 떠올린다. 시작은 거창하더라도 여건을 탓하며 방향을 틀거나 애초의 뜻을 접고 허망하게 구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지. 주저앉고 싶은 순간에 이 바위를 떠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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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는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전인 418년 창건했다. 신라 땅 두 번째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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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 대웅전은 1735년 중건한 것으로 건물과 탱화, 수미단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문의 054-429-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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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 마음을 들여다보아 깨달음에 이른다는 이름의 절이다.
눈앞에 백두대간이 흘러간다. 마음을 직시하라 가르친다.

1600년 시간의 정성과 발원

직지사엔 스치고 지나가기 아까운 볼거리가 많다.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어 새로 짓고 1735년 중건한 대웅전은 300년 세월이 고스란해 구석구석 더듬게 된다. 단정한 문살 아래 색 바래 가는 그림이 사랑스럽다. 내부의 불상 뒤에는 탱화가 1744년부터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불상을 모신 수미단은 용과 새와 온갖 꽃을 조각해 채색했다. 수미단 한편에 관음보살을 상징하는 파랑새가 노닌다. 대웅전은 물론이고 옛사람의 상상과 솜씨가 담긴 탱화와 불단 역시 국가가 보물로 지정했다. 단청의 아름다움은 말해 무엇하랴. 서까래 아래에는 꽃병으로 보이는 그림을 잇달아 그렸는데, 하나하나 무늬가 다르다. 대웅전에 쏟은 정성이 하 갸륵해 탑돌이 하듯 몇 바퀴를 돌면서 감탄했다. 건물 전체가 위에 계신 이에게 전하는 꽃다발 같다.

정성과 발원이 1600여 년간 쌓인 공간은 왕에게 선택받은 길지이기도 했다. 조선 정종 임금은 자신의 태를 직지사 위 산봉우리에 옮겨 봉안하도록 했다.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파헤쳐 이전하기 전까지 500년 이상 어태를 직지사가 보호했다. 지금도 성보박물관과 안양루 앞마당에 태실 난간과 석물이 있다. 

경내는 늠름한 나무와 유독 낮은 담장의 비율이 조화롭다. 그 가운데 고만고만한 단풍나무가 도열한 터널에는 사람들이 소원 쓴 종이를 달아 놓았다. “엄마가 낫게 해 주세요.” 가족 건강, 시험 합격, 취직 기원, 사업 번창이 대다수인 문구에서 저 말이 눈에 띈다. 내 안에 꽉 찬 내 소원을 잠시 밀어내는 말. 누군지 모르는 그 어머님의 쾌유를 빌었다. 이를 발견하는 사람 모두가 그러하겠다.

물길을 거슬러 명적암에 오른다. 웅장한 풍경이 전하는 기세가 굉장하다. 황악산 허리에 들어선 암자에서는 백두대간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밝은 적막이라. 어둠과 어울리는 고요함이라는 한자에 밝음을 뜻하는 한자를 붙였다. 명적암에서 자연의 고요함에,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직지(直指). 손가락이 어디로 향하는가. 무엇을 가리키는가. 마음을 들여다보아 깨달음에 이른다는 이름의 절이다. 마음만 제대로 들여다보아도 깨달음에 이를 것을, 눈을 오만 데 두느라 마음을 직시하지 못한다. 실은 마음 직시하기가 두렵기도 하다. 직지, 두 글자를 굴리며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온다. 때로는 가까이, 때로는 아득하게 물소리가 따라와 주어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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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공원은 여행자센터, 김천시립박물관, 건강문화원 숙박동과 체험동 등을 갖추어 알찬 시간을 보내기 좋다.

사명대사공원은 여행자센터, 김천시립박물관, 건강문화원 숙박동과 체험동 등을 갖추어 알찬 시간을 보내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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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카페는 사명대사공원의 상징인 평화의 탑을 감상하고 인증 사진을 찍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문의 054-437-7979

한옥 카페는 사명대사공원의 상징인 평화의 탑을 감상하고 인증 사진을 찍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문의 054-437-7979

여행자를 반기는 진심, 사명대사공원

직지사 바로 옆이 사명대사공원이다. 산자락 지형을 살려 14만 3695제곱미터(약 4만 3400평) 부지에 조성한 공원은 여행자센터, 김천시립박물관, 건강문화원 숙박동과 체험동, 한복 대여점 등을 갖추어 알찬 시간을 약속한다. 여행자센터에서는 짐을 맡기고, 600여 권의 신간과 베스트셀러를 읽고, 김천8경을 VR로 감상하고, 한 달이 지나 도착하는 느린 엽서를 쓸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무료다. 건강문화원에서는 수압 마사지기, 광물질인 일라이트 온열 의자, 음파 온열기 같은 눈이 휘둥그레지는 다양한 기기에 라벤더 족욕까지 체험한다. 한옥 중정, 하늘이 뻥 뚫린 마루에 앉아 보랏빛 따스한 물에 발을 담그니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 온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창밖의 백두대간을 바라보는 시간도 마찬가지다.

공원의 상징은 평화의 탑이다. 승리와 보복이 아닌 평화를 위해 협상에 임한 사명대사의 뜻을 기려 지은 41.5미터 높이의 5층 목탑은 자체로도, 백두대간 지세와 어우러져서도 한 풍경을 이룬다. 한옥 ‘카페, 밀’은 탑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 김천이 고향인 젊은 대표가 오랫동안 커피와 제빵을 해 온 부모님의 기술과 자세를 이어받아 손님을 맞는다. 아버지가 세심하게 고른 원두로 내린 커피, 대표가 직접 고안하고 만들고 보완하고 마침내 완성한 빵 메뉴에 진심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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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문화원 체험동에서는 다양한 기기를 이용한 마사지와 라벤더 족욕을 체험할 수 있다.

건강문화원 체험동에서는 다양한 기기를 이용한 마사지와 라벤더 족욕을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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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의 하루가 저문다. 은은한 조명이 좋다는 감상도 잠시, 밤하늘 흐드러진 별에 말을 잊었다.
별을 눈에 쓸어 담았다. 차가운 공기마저 달콤한 밤이다.

김천이 건넨 말을 기억하다

걷는 재미가 붙어 공원을 산책하는 사이 날이 저물고 평화의 탑에 불이 켜진다. 은은한 조명이라 좋다는 감상도 잠시, 말을 잊었다. 하늘에 별이 흐드러져 있다. 목이 뻐근할 만큼 밤하늘을, 별빛을 눈에 머금었다. 쓸어 담았다. 사람을 꿈꾸게 하는 빛이 김천의 하늘에 만개했다. 차가운 공기마저 달콤하다.

녹지 않는 말이 있다. 몸을 낮추고, 구부러져야 할 때 구부러진 담장은 아름답다. 세상 어디든 내 몸 하나 기댈 바위는 존재할 테니 거기서 시작하면 되는구나 생각했다. 직지,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직시하면서 계속 걸어 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겨울, 김천이 선물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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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명대사공원 즐기기

14만 3695제곱미터 규모의 공원은 여행자를 환대하는 김천의 진심, 여행자를 만족시키겠다는 김천의 야심이 느껴지는 곳이다. 여행자센터에서는 신간과 베스트셀러를 읽고 한 달 뒤 도착하는 느린 엽서를 무료로 보낼 수 있다. 한복 대여점은 평상시 입기 힘든 다양한 한복을 준비했다. 한옥 숙박동은 합리적 가격에 편안한 시설을 갖추어 인기 만점이다. 직지사, 직지문화공원, 모티길이 인근이라 여행 동선 짜기도 편리하다. 문의 054-421-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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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김현정
Photographer 박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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