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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여행처럼, 경주

바다에서 내륙까지 경북 경주를 걷는 동안여행하는 매 순간이 삶처럼 아름다웠다.

UpdatedOn December 2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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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햇살이 쏟아지는 바다로 다가갔다. 조금씩 번지는 빛의 물결이 어느 순간 시야를 덮었고, 다른 모두는 햇살 뒤로 숨어들었다. 우리는 바다를 응시했다. 걸음을 멈췄으며 빛과 눈을 마주쳤다. 바다가 내어 주는 파란 서정으로 숨을 쉬었다. 해가 솟은 지 얼마 안 된 시각, 놀랍도록 눈부신 경주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 서울 출발을 기준으로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신경주역까지 2시간 10여 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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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온전히 집중하도록 하는 길을 유영하듯 나아간다. 나긋한 하늘, 감미로운 바다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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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소리길은 읍천항에서 하서항까지 1.7킬로미터에 이르는 해안 산책 길이다.

햇살과 함께 걷는 파도소리길

읍천항에서 경주 여행을 시작했다. 바다를 기점으로 정한 건 경주를 새롭게 그리기 위해서였다. 천년 도읍의 역사가 선명하고 자취 또한 건재하나, 그 위에 지금 경주를 겹쳐 그리고 싶었다. 옛일만 기웃거리기엔 경주의 오늘이 이토록 찬란하니까. 시야를 메운 저 읍천항 아침 바다처럼. 이곳에서 하서항까지 1.7킬로미터에 이르는 파도소리길을 빛살과 함께 걷는다. 가뭇하게 사라지는 새벽 공기가 잔향을 흩뿌려 정신을 맑히고, 간단없이 흐르는 파도 소리는 발걸음을 홀가분하게 만들어 준다.

지 않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내리 아담하다. 때론 구부러져 다음 길이 드러나지 않는다. 경주 파도소리길은 자그맣고 순하며 해안선을 따라 흔들린다. 대단하다 할 순 없는 길, 그리하여 바다는 깊이 스민다. 자신을 감춘 채 파도와 소리에 온전히 집중하도록 하는 길을 유영하듯 나아간다. 나긋한 하늘, 감미로운 바다의 노래. 여러 굴곡을 통과해 바다에서 돋아난 주상절리를 만났다. 수백만 년 혹은 수천만 년 전에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육각과 오각의 기묘한 돌덩이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가마득한 과거 어느 날에 그랬듯이 하얀 포말이 부챗살 모양 절리를 쓰다듬고 대해로 빠져나간다. 절리 가장자리는 윤슬에 에워싸여 거무스름하게 반짝이고 있다.

자연이 생성 소멸하는 과정을 낱낱이 알 방도는 없어도 세월을 머금은 절리는 오래도록 신비로울 것 같다. 뜨겁게 타오른 땅이 바다로 엎지른 용암은 순식간에 식으면서 주상절리가 됐다. 어수선한 일상이 달군 마음을 경주 바다에 대어 본다. 검은 돌덩이와 하얀 포말과 푸른 하늘이 밀려와 가슴을 어루만진다. 은빛 햇살이 쏟아지는 바다에서 걸음은 점점 느려진다. 종종 멈추기도 했지만 실은 멈추지 않았다. 마음은 계속 하늘을 담고 바다를 마신다. 경주 파도소리길 광활한 풍경이 우리를 흘러간다.

하서항에 이르러 첫 번째 여정을 마무리했다. 가운데 하늘로 올라선 태양이 다음 여정을 안내한다. 태양을 좇아 서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토함산을 넘어 경주 내륙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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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어둠을 밝히는 미디어 아트 ‘찬란한 빛의 신라’가관람객의 시선을 제 품으로 거두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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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마다 다른 정취, 경주엑스포대공원

바람이 고운 오솔길을 걷다 돌아보았다. 나무들 틈에서 이곳 들머리가 시야에 잡힌다. 입구를 통과하고 한참 지났는데, 그리 많이 오지는 않은 것이다. 긴 시간 느리게 배회한 숲은 경주 바다의 파란 서정을 닮았다. 마음에 들어와 서걱거리는 바람과 나무를 경주의 기억에 얹는다. 토함산 끝자락, 경주엑스포대공원에서 고즈넉한 순간을 누린다.

1998년에 문을 연 경주엑스포대공원은 황룡사 구층목탑을 형상화한 경주타워를 비롯해 정원과 산책로, 솔거미술관, 다양한 체험 시설로 경주 시민과 여행자에게 사랑받았다. 축구장 80개가 들어갈 만큼 널찍한 공원 곳곳에 잘 다듬은 산책로가 놓여 어느 때 와도 계절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공원 입구에서 솔거미술관으로 가는 길에 비밀의 정원을 감상했다. 나뭇잎이 한들대는 수면에 경주타워가 비치는 정원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저들의 배회도 긴 시간 느리게 이어지리라. 정원을 빠져나와 비움명상둘레길을 거쳐 천마의 궁전에 다다랐다. 경주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모티프로 제작한 거대한 미디어 아트 ‘찬란한 빛의 신라’가 여기서 시작된다. 첨성대를 상징하는 입체 조형물 주변으로 LED 조명이 별빛처럼 내리는 ‘경계에 서다’, 천마총 금관과 황금 꽃비가 관람객의 움직임을 따라 흩날리는 ‘찬란함을 잇다’, 석굴암 조성 과정을 색과 선으로 함축해 사방에 투영한 ‘별과 이야기하다’, 실크로드의 시작점이던 서라벌, 그리고 사막과 오아시스를 몽환적 물결로 묘사한 ‘오아시스를 만나다’ 등 총 여덟 작품이 천마의 궁 전 건물을 빼곡 채웠다.

경주가 간직한 유산을 현재 언어로 표현한 전시를 하나하나 읽어 나간다. 짙은 어둠을 밝히는 빛 축제가 관람객의 시선을 제 품으로 거두어들인다. 우리는 정원에서 보낸 한때를 끌어와 찬란한 이곳 빛의 순간과 아우른다. 익숙한 문화유산을 새롭게 느끼는 공간에서 더디 흐르는 시간과 나란히 걷는다. 바다를 떠다니는 양 작품 속을 부유하는 동안 잡다한 생각이 잦아들고 감각은 깨어난다. 경주 한편에서 조우한 경주의 모든 시간과 공간. 기대를 뛰어넘는 광경에 내내 만족스럽던 관람을 마치고 다시 산책로로 갔다. 계절이 선사한 색을 입고 약동하는 경주엑스포대공원의 리듬에 맞춰 걸음을 옮긴다. 천천히, 오랫동안 경주를 걸었다.

 +  경주엑스포대공원은 경주타워를 비롯해 정원과 산책로, 다양한 체험 시설을 갖췄다. 문의 054-748-3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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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리단길과 경주대릉원을 비롯해 경주 곳곳에는 다양한 한옥 숙소가 있다.


기와지붕 아래에서 소나무가 햇살을 받는다. 대청 양옆으로는 한지 문창살이 은은한 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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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가 윤을 내는 지붕 아래에서 소나무 한 그루가 오후 햇살을 받고 있다. 뜰을 감싼 나무 기둥이 소나무 앞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고, 담장 밑동에 무더기로 핀 꽃은 옅은 향기를 바람에 실어 보낸다. 대청 양옆으로는 한지를 바른 문창살이 은은한 빛을 낸다. 황리단길 거리를 살짝 비껴 대문을 넘어선 찰나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대청을 올라 뒤꼍에서 넘어온 볕에 몸을 넣는다. 포근한 햇살. 황리단길과 경주대릉원 사이에 위치한 한옥 숙소에서 여행의 경험이 일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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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를 시간, 경주의 한옥

‘소설재’는 통일신라 시대에 쓰인 우물을 중심으로 터를 다지고 뜰과 한옥을 만들었다. 축대와 기둥을 전통 방식으로 쌓아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막았으며, 대들보와 서까래는 사계절 단단한 미송을 써 뒤틀리거나 갈라지지 않도록 했다. 대문 옆 1층은 숙소와 카페이고 2층에도 숙소인 누각을 세웠다. 2층에서 창을 열자 바깥으로 층층이 가득한 한옥 용마루와 남산 능선의 풍경이 방 안으로 밀려든다. 창에 유리를 덧대 열지 않아도 방에 풍경이 고인다. 빛살이 어리는 방에서 문창살 틈으로 파고드는 경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뜰로 내려와 다시 대청에 앉았다. 뒤꼍 담장에 붙은 대나무에서 솨솨 소리가 날아오더니 대문을 지나 황리단길로 사라진다. 집에 밀려드는 풍경과 거리로 날아가는 소리를 마음에 담는다. 손끝까지 따듯해지는 지금, 경주에 밤이 찾아오고 있다.

헤아리건대, 휴식은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단절이라기보다 둘을 하나로 맺는 연결일 테다. 오늘 하루 우리는 경주를 살았다. 바다에서 내륙에 이르는 길 곳곳에서 삶을 이었다. 천년 도읍의 건재한 자취 위에 현재 경주를 겹쳐 그린 오늘이 어제와 다름없이 저물어 간다. 나무 기둥 그림자가 담장까지 늘어졌으니 곧 어둠이 들고 뜰에 밤하늘이 내리겠다. 휴식이 아니고는 무엇도 떠오르지 않는 밤의 어귀에서 별빛을 기다린다. 대청을 건넌 대나무 소리가 뜰을 스쳐 거리로 나아간다. 소리 한 자락 쥐어 들고 밤의 경주를 산책한다. 들뜬 분위기가 흘러나오는 골목 어디쯤에서 손바닥을 폈다. 솨솨, 골목에서 경주의 소리가 들린다. 오늘이 아름답다. 그리하여 경주는 내일도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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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뜬 황리단길에서 한옥 대문을넘어선 순간, 온 사위가 고요해진다.대청에 어린 볕이 따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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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김규보
photographer 신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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